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문단 편집) == 생애 == 글라주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출판업자였고 모친은 피아니스트이자 [[밀리 발라키레프|발라키레프]]의 제자였는데, 어린 시절 글라주노프의 재능을 알아본 모친이 아들을 자신의 스승인 발라키레프에게 소개했다. 발라키레프는 당시 14세였던 글라주노프를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데려갔는데, 사람을 가려서 제자를 받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였지만[* 재능이 보이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스트라빈스키]]도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갔지만 기초가 부족하다면서 퇴짜를 먹은 적이 있다. 절치부심한 스트라빈스키는 좀 더 음악 공부를 한 후에 간신히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재능에 놀란 나머지 바로 제자로 받아들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당시의 글라주노프에 대해 "그는 하루 단위가 아니라 매 시간 단위로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면서 단순한 칭찬의 수준을 넘는 극찬의 말을 남겼으며, 그를 가르친지 2년이 되기도 전에 더 가르칠 것이 없다면서 음악교육을 끝냈다. 어린 시절 글라주노프는 비상한 기억력으로 유명했다. 그와 관련된 일화 중에는 기억력과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아무리 긴 곡도 한 번 들으면 켤코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40분 분량의 자신의 교향곡을 피아노로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옆방에서 이 연주를 듣고 있던 글라주노프가 그 긴 곡을 그대로 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가 보로딘의 작품을 보완하는데 참여했던 것도 어린 시절 들었던 [[알렉산드르 보로딘|보로딘]]이 직접 피아노로 연주한 미완성 부분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보로딘의 연주를 재현했다는 그의 주장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기억력이 뛰어났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와 관련된 일화 중에는 과장된 것들이 많기 때문. 후에 글라주노프는 이고르 공 보완작업에 대해 이 오페라의 3막은 사실상 자신이 썼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1881년]] 글라주노프는 16세에 현악 4중주 1번(Op.1)을 발표했고 17세 때인 1882년에는 교향곡 1번(Op.5)을 초연했는데, 현재까지 러시아(소련 포함)에서 가장 이른 나이에 정식 교향곡을 발표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 1번 교향곡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스승 발라키레프와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물론 [[차이콥스키]] 등으로부터도 격찬을 받았으며 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이 교향곡을 들은 후 그를 ‘소년 삼손’이라고 표현했다. 글라주노프는 이 때부터 촉망받는 소년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로 명성을 얻게 된다. ||[youtube(W4yQV5SYHo0)]|| || 글라주노프, 교향곡 1번 E장조 || 한편 이 첫 교향곡이 발표되자 당시 부유한 목재상이자 음악가들의 후원자였던 미트로판 벨랴예프(1836~1904)는 글라주노프를 눈여겨보고 자신이 만든 진보적인 음악가들의 모임인 벨랴예프 살롱에 그를 참여시켰다. 이후 글라주노프는 벨랴예프의 도움으로 그의 작품들을 출간하고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1884년에는 벨랴예프와 함께 바이마르로 가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다. 리스트는 글라주노프의 재능과 열정을 칭찬하면서 자신의 지휘로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1번을 바이마르에서 초연했으며 글라주노프가 연주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홀을 대여해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리스트의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글라주노프는 1886년 리스트가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자신의 2번째 교향곡 '리스트를 추억하며(To the Memory of Liszt)'를 작곡하기도 했다. [[1885년]] 20살된 해에는 벨랴예프가 만든 [[미하일 글린카|글린카]]상의 수상자가 됐으며 교향시 '스텐카 라친'을 [[알렉산드르 보로딘]]에게 헌정했다. 보로딘이 1887년에 사망하자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이고르 공'과 교향곡 제3번 등을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보완해서 완성하기도 했다. [[1888년]] 23살에 지휘자로도 데뷔했다. 이 때까지 글라주노프의 음악은 스승들의 영향을 받아서 러시아 국민악파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는데 1890년대부터는 국민악파적인 경향이 점차 약해지고 [[표트르 차이콥스키|차이콥스키]]와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 등의 영향이 많이 나타는 독일 낭만주의 스타일의 작법으로 회귀하게 된다. 굳이 좋게 말하면 좀더 세련되고 정교한 음악을 추구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대신 이 시기 이후 글라주노프의 음악에서는 더 이상 파격과 새로운 경향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또 이 시기부터 차이콥스키의 영향으로 발레음악 등의 무대음악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 다만 오페라는 작곡하지 않았다. 한편 글라주노프는 성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냥 술을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경력에 (당연히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작곡가로서의 명성과 별도로 지휘자 및 연주자로서 글라주노프는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그는 리허설을 할 때도 중간중간 술을 마셨으며 공연에서 종종 술에서 덜 깬 채로 지휘를 하는 바람에 연주를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성인이 된 이후 글라주노프의 행보는 어린 시절 신동으로 각광았을 때의 기대치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으며 점점 보수화되는 그의 음악 성향에 대해 당연히 실망과 비판이 이어졌다. 하지만 서구의 세련되고 잘 정립된 음악수법을 적극 익히고 도입하려고 했던 글라주노프의 성향은 비판 못지 않게 나름의 명분과 정당성을 인정받았으며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후원자 벨랴예프가 변함없이 그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에 글라주노프의 음악적 입지는 계속 탄탄대로를 걸었다. 1899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주선으로 이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99년]] 모리스 푸티파의 대본에 의해 발레곡 <사계>가 작곡되어 이듬해 2월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사계절을 의인화한 4막의 발레로 '겨울' '봄' '여름' '가을'로 이루어졌고 작품번호 67이다. 봄으로 시작해서 겨울로 끝나는, 사계절을 제재로 한 여타의 작품과는 달리 겨울로 시작해서 가을로 끝난다. 특히 가을중 <아다지오>[* [[소치 올림픽]] 아이스댄싱 은메달 테사 버츄 스캇 모이어조가 이곡을 프리에 사용했다. ]가 백미로 클라식 라디오에서도 가을만 되면 리퀘스트되는 명곡이다. 또한, 사계는 <레이몬다>와 쌍벽을 이루는 글라주노프의 대표적인 발레곡으로, 러시안 발레의 프로그램을 장식하는 곡이다. 1막 4장의 무곡으로, 또한 같은 형식으로 연주용 모음곡으로도 만들어졌다. 러시아 아카데미즘을 구축한 글라주노프의 세련된 감각이 이 작품에서도 생생히 살아 있으며, 그 특유의 전원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담담한 수법으로 잘 그려져 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지자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시위대의 편을 들면서 시위의 자유를 주장하다가 음악원에서 쫓겨났는데, 이 때 글라주노프도 스승을 따라 사임했지만 얼마 후에는 오히려 음악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애초에 글라주노프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데다 그처럼 음악원의 각종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 글라주노프는 음악원장이 된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다시 복귀시켰지만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얼마 후인 1908년에 사망했다.] [[1908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망하자 글라주노프는 암묵적으로 그의 후계자가 되어 명실상부한 러시아 음악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인 [[스트라빈스키]]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자 유족들이 '걱정 마, 아직 우리에겐 글라주노프가 있으니까'라고 반응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가 체제 전복과 혁명으로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는 와중에도 그의 입지는 큰 흔들림 없이 승승장구했으며, 1922년에는 인민 예술가라는 훈장까지 받았다. 글라주노프는 공식적으로는 193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 직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28년 빈에서 열린 슈베르트 100주기 추모 행사와 관련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기 위해 떠난 후 1936년에 사망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였지만 당시 소련 공산당의 숙청을 피하기 위해 많은 유명인사와 예술가들이 소련을 떠났던 것을 생각해 보면 글라주노프 역시 일종의 망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1928년에 사실상 소련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글라주노프는 2년 가까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면 당시 소련에서 그의 입지가 얼마나 탄탄했는지 알 수 있다. 소련을 벗어난 글라주노프는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고 파리 근교에 정착해서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을 떠난 이듬해인 1929년에는 64세의 나이로 뒤늦게 결혼을 했는데, 부인은 그의 제자였던 피아니스트 율리야 가브릴로바의 어머니였다.[* 결혼 후 글라주노프는 율리야를 양녀로 삼았으며 율리야는 글라주노프 사후 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1936년]] 글라주노프는 자신이 정착한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인근 묘지에 묻혔다가 1972년 레닌그라드의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